대련장은 라이더를 만들어내거나 부순다. 어쨌든 훌륭한 드래곤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라이더를 선택할 리 없고, 훌륭한 생도는 비행단에 해를 끼치는 인물이 훈련을 계속하게 허락할 리 없기 때문이다.
― 애펜드라 소령, 《휴대용 라이더 분과 도감》
“엘레나 소사, 브레이든 블랙번.” 피츠기븐스 대위가 다른 서기 두 명을 옆에 거느리고 연단에 서서 사망자 명단을 읽었다. 우리는 안마당에 조용히 대열을 맞춰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른 아침 해를 보았다.
오늘 아침, 우리는 라이더의 검은 제복을 입었다. 내 쇄골에는 1학년을 의미하는 은색 사각별 한 개가, 어깨에는 제4비행단 패치가 붙어 있었다. 어제 난간다리 시험이 끝난 뒤 제복 한 벌과 여름용 딱 붙는 튜닉, 바지, 액세서리를 지급받았지만 비행용 가죽옷은 받지 못했다.
10월에 있을 탈곡에서는 절반이 살아남지 못할 테니 이보다 두껍고 단단한 전투용 제복을 나눠줘 봐야 소용이 없을 터였다.
미라가 나에게 만들어준 코르셋 갑옷은 정규복장이 아니었지만 개조한 제복이 주위에 수백 벌이다 보니 운 좋게 잘 섞여 들었다.
지난한 24시간을 보내고 1층 막사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니 이제 나도 라이더 분과 특유의 분위기를 알 것 같았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본능에 충실한 쾌락주의와 무자비한 효율주의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제이스 서덜랜드.” 피츠기븐스 대위는 명단을 계속 읽었고, 옆에 선 서기들은 자세를 바꿔 섰다. “두갈 루페코.”
50명쯤 부른 후였나, 몇 분 전에 딜런의 이름이 나왔을 때는 나도 숫자를 잊어버렸다. 그들의 추도식은 이 자리가 다였고, 이 성채에서 이름이 불리는 것도 지금뿐이었다. 그러니 나도 집중해서 모든 이름을 기억하려 했지만, 너무 많았다.
미라가 말한 대로 밤새 갑옷을 입고 잤더니 피부가 들뜨고 무릎도 아팠지만 몸을 굽혀 붕대를 바로잡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사생활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1학년 막사 침대에서 용케 다른 사람이 깨어나기 전에 묶어둔 것만도 다행이었다.
기숙사 건물 1층에는 생도 156명이 있었고, 침대는 뻥 뚫린 공간에 깔끔하게 네 줄씩 놓여 있었다. 다행히 잭 발로우는 3층에 배정받았지만 누구에게도 내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누굴 믿을 수 있을지 알기 전까지는 안 된다. 개인실은 비행용 가죽옷과 마찬가지로 탈곡에서 살아남아야만 얻을 수 있다.
“시몬 카스타네다.” 피츠기븐스 대위가 두루마리를 말았다. “이들의 영혼을 말렉에게 맡기노라.” 말렉은 죽음의 남신이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명단이 생각보다 끝에 가까웠나 보다. 공식적으로 해산하라는 마무리는 없었다. 마지막 묵념의 시간도 없었다.
두루마리에 적힌 이름들은 서기들과 함께 연단을 떠나고, 침묵은 대대장들이 몸을 돌려 자기네 대원에게 말을 걸면서 깨졌다.
“다들 아침을 먹었길 바란다. 점심식사 전까지는 아무것도 먹을 기회가 없을 테니까.” 데인이 말했다. 그의 눈은 심장이 한 번 뛸 시간만큼 내 눈을 쳐다 보았다가 무관심한 척 곧 멀어졌다.
“너랑 모르는 사이인 척 잘한다.” 리애넌이 옆에서 속삭였다.
“그러게.” 똑같이 조용히 대꾸했다. 입 끝이 저절로 올라갔지만, 나는 데인 의 모습을 만끽하면서도 얼굴을 최대한 무표정하게 유지했다. 햇빛이 그의 황갈색 머리카락에서 춤을 췄다. 데인이 고개를 돌리자 어째선지 어제는 놓쳤던 턱수염 안의 흉터가 보였다.
“2학년과 3학년은 어디로 갈지 알고 있겠지.” 데인이 말하는 동안에도 서기들은 안마당 가장자리를 지나 자기네 분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곳이 ‘내’ 분과여야 했다고 항의하는 마음속 작은 목소리를 무시했다. 지나간 길에 매달려봤자 살아서 내일의 태양을 보는 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앞에 선 선배 생도들이 동의하는 소리를 냈다. 1학년인 우리는 1대대를 구성하는 작은 사각형의 뒤쪽 두 줄에 서 있었다.
“1학년들, 너희 중에 어제 받은 학사 일정을 외운 생도가 한 명쯤은 있겠지.” 데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 엄한 얼굴의 진지한 지휘관과 내가 쭉 알고 지냈던 재미있고 잘 웃는 남자를 조화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한데 뭉쳐라. 오후에 체육관에서 만날 때까지 전원 살아 있기를 바란다.”
젠장, 오늘 대련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일주일에 체육관 수업은 두 번 뿐이니까 오늘 수업만 별 탈 없이 끝낸다면 앞으로 며칠은 위험에서 벗어난다.
적어도 ‘건틀릿’ 시험을 감당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다. 건틀릿이란 두 달 후 나뭇잎 색이 변하면 우리가 통달해야 할 무시무시한 수직 장애물 코스였다.
우리가 마지막 건틀릿을 정복한다면 그 너머의 깎아지른 협곡을 통과해 ‘시연’을 위한 비행장으로 갈 것이고, 그 자리에서 올해 계약할 의사가 있는 드래곤들이 남은 생도들을 처음으로 볼 것이다. 그리고 이틀 뒤에 성채 아래 계곡에서 드래곤의 선택 또는 죽음을 받는 탈곡이 시작된다.
나는 새로운 대대 동료들을 둘러보면서 누가 계곡은 고사하고 비행장까지라도 가게 될지 생각했다. 누구라도 가게 되기는 할까.
내일의 골칫거리를 미리 생각하진 말자.
“우리가 못 살아남으면 뭔데요?” 뒤쪽에 있던 건방진 1학년이 물었다. 나는 굳이 돌아보지 않았지만 리애넌은 돌아보더니 다시 앞을 보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그때는 내가 너희 이름을 외울 필요가 없겠지. 내일 아침 명단으로 읽힐 테니까.” 데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내 앞에 있던 2학년이 비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왼쪽 귓불에 달린 작은 고리 모양 귀고리 두 개가 쟁그랑거렸는데, 옆자리의 분홍 머리 2학년은 흔들림이 없었다.
“소여?” 데인이 내 왼쪽에 선 1학년을 쳐다보았다.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주근깨가 뒤덮인 밝은 색 피부의 키가 크고 강인한 생도가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근깨 있는 턱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연민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는 일명 ‘되풀이 생도’였다. 탈곡 때 드래곤과 계약을 맺지 못해서 1년을 또 반복해야 하는 생도.
“해산.” 데인이 명령하자 우리 대대도 다른 대대와 비슷하게 흩어졌다. 안마당은 각 잡힌 대형에서 수다 떠는 생도 무리로 변했다. 2학년과 3학년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고, 데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겐 수업에 들어갈 때까지 20분이 있다.” 소여가 여덟 명뿐인 우리 대대 1학년에게 외쳤다. “학예동 건물 4층 왼쪽 두 번째 방이다. 늦지 않도록 해.” 그는 우리가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기숙사 쪽으로 가버렸다.
“힘들겠다.” 기숙사 쪽으로 이동하는 군중을 따라가면서 리애넌이 말했다.
“다시 이 모든 걸 반복해야 한다니 말이야.”
“죽는 것보다야 낫지.” 아까의 건방진 녀석이 오른쪽으로 지나가면서 말했다. 그는 키가 조금 작았는데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이마 위로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어젯밤 저녁식사 전에 있었던 짧은 소개를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그의 이름은 리독이었다.
“그건 사실이야.” 나는 문 앞을 메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면서 대꾸했다.
“내가 3학년이 하는 말을 엿들었는데, 1학년이 계약 없이 탈곡에서 살아남 으면 원할 경우에 1년을 되풀이해서 다시 시도하게 해준대.” 리애넌이 덧붙여 말했다. 나는 1년을 살아남고 나서도 언젠가 라이더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위해 이 생활을 반복하려면 얼마나 투지가 있어야 할까 생각했다. 말이 두 번째지 결국은 첫 번째와 똑같이 쉽게 죽을 수 있는데 말이다.
왼쪽에서 새소리가 들려 군중 너머를 본 나는 심장이 펄쩍 뛰었다. 그 소리를 바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데인이었다.
새소리가 다시 들렸고, 나는 소리의 진원지를 로톤다 문 근처로 좁혔다. 데인이 널찍한 계단 위에 서 있었고, 눈이 마주치자 아주 살짝 문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나는 저기….” 내가 말하기도 전에 리애넌은 이미 내 시선을 읽었다.
“네 물건은 내가 챙겨갈게. 네 침대 밑에 있는 거 맞지?”
“괜찮겠어?”
“네 침대는 내 침대 옆이야, 바이올렛. 귀찮을 것도 없어. 가봐!” 리애넌은 공모자 같은 미소를 짓더니 내게 어깨를 부딪쳤다.
“고맙다!” 나는 얼른 미소 짓고는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가장자리로 빠져나갔다. 다행히도 공용 구역 쪽으로 가는 생도는 많지 않았다. 로톤다에 달린 거대한 네 개의 문 중 하나로 슬쩍 들어가는 내 모습을 볼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나는 숨을 훅 들이켰다. 아카이브에서 보았던 투시도와 같았지만 어떤 그림이나 예술매체도 그 공간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모든 면에서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제대로 잡아낼 수 없었다.
이 로톤다는 라이더 성채만이 아니라 바스지아스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일 수도 있다.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에서부터 부드러운 아침 햇살을 걸러 넣고 있는 돔 형태의 유리 천장까지 3층 높이였다.
왼쪽에는 학예동으로 이어지는 육중한 아치문이 두 개 있고, 오른쪽에는 기숙사로 이어지는 똑같은 문이 두 개 있으며, 내 앞으로 여섯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강당으로 열리는 입구 네 개가 나온다.
로톤다 내부에 똑같은 간격을 두고 서 있는 빨간색, 초록색, 갈색, 오렌지색, 파란색, 검은색으로 반짝이는 위압적인 대리석 기둥 여섯 개는 마치 저 위 천장에서부터 떨어져내리는 드래곤 같은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기둥 아래쪽에 새겨진 으르렁거리는 드래곤의 입들 사이, 중앙에는 최소한 4개 대대가 들어가고도 남을 공간이 있지만 지금은 다 비어 있었다.
짙은 빨간색 대리석으로 조각한 첫 번째 드래곤 옆을 지나는데 어떤 손이 내 팔꿈치를 잡더니 기둥 뒤쪽에 있는 발톱과 벽 사이 틈으로 끌어당겼다.
“나야.” 나를 돌려세워서 마주보는 데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그의 온몸에서 긴장감이 뿜어져 나왔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새소리로 날 불렀잖아.”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씩 웃었다. 데인은 우리가 크로블란 경계선 근처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그 신호를 사용했다. 우리 부모님이 남부 비행단과 함께 주둔했을 때부터 말이다.
데인은 나를 훑어보면서 이마를 찌푸렸다. 보나마나 새로운 상처가 없나 살피는 눈길이었다. “여기가 꽉 찰 때까지 몇 분 안 남았어. 무릎은 어때?”
“아프지만 죽진 않을 거야.” 나는 이보다 훨씬 심한 상처도 입어봤고, 우리 둘 다 그 사실을 알았지만 긴장을 풀라고 말해봐야 소용없을 게 뻔했다.
“어젯밤에 네게 집적댄 사람은 없고?” 데인은 걱정하느라 이마에 골이 패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주름을 펴주고 싶어지는 스스로를 다잡으려 팔짱을 꼈다. 데인의 걱정은 내 가슴에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다.
“그랬다 한들 그렇게까지 나쁠까?” 나는 억지로 활짝 웃으면서 놀렸다. 데인은 두 팔을 옆에 늘어뜨리면서 로톤다에 메아리칠 정도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뜻이 아닌 거 알잖아, 바이올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