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뇌를 메고 두루마리를 든 빨간 머리가 앞으로 나와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생도들은 대열로 이동했고, 나는 옷차림과 오만한 정도에 근거하여 빠른 판단을 내리며 숫자를 셈했다. 각 대대마다 대략 15명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잭은 제1비행단 불꽃전대에 호명됐다.
타라는 같은 비행단 꼬리전대에 들어갔고, 곧 제2비행단 호명이 시작됐다. 나는 비행단장이 앞으로 나갈 때 제이든이 아닌 걸 보고 감사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애넌과 나는 제2비행단 불꽃전대 2대대에 호명됐다.
우리는 재빨리 대열에 합류해 정사각형으로 정렬했다. 빠르게 살펴보니 우리에겐 대대장 한 명(나를 쳐다보지 않고 있는 데인), 여성인 부대대장이 한 명, 2학년이나 3학년일 수 있는 라이더 네 명, 그리고 1학년 아홉 명이 있었다.
라이더 중 제복에 별이 두 개 붙어 있고 머리카락 절반은 분홍색, 절반은 삭발한 여자는 반역의 인장을 휘감고 있었다. 표식은 손목에서부터 팔꿈치까지 올라가다가 제복 안으로 사라졌는데 혹시나 그 여자에게 빤히 쳐다보는 모습을 들킬까 봐 급히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나머지가 호명되는 동안 침묵했다. 이제는 제대로 떠오른 해가 가죽옷을 때리고 살을 지졌다. ‘그이에게 널 도서관에만 두지 말라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 들었던 어머니의 말이 계속 떠올랐지만 어차피 이 상황에 대비할 순 없었다. 햇빛에 관해서라면 나에게는 정확히 두 가지 피부 상태밖에 없다. 창백하거나, 화상을 입거나.
그때 명령이 들려와 우리는 연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두루마리를 든 여자에게 시선을 계속 두려고 했지만, 두 눈이 배신자처럼 혼자 움직이면서 맥박이 치솟았다. 제4비행단의 단장 자리에 선 제이든이 내 죽음을 계획하는 듯이 차갑고 계산적인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턱을 들어올렸다. 제이든은 흉터 있는 쪽 눈썹을 비뚜름하게 꺾었다. 그러더니 제2비행단장에게 무슨 말을 건넸다. 곧이어 모든 비행단장이 합세해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리애넌이 속삭였다.
“조용.” 데인이 잇새로 말했다.
등이 뻣뻣해졌다. 이 자리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나의’ 데인이기를 기대할 수야 없지만 그래도 그 말투는 거슬렸다.
마침내 비행단장들이 우리 쪽을 돌아보았고, 제이든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간 모습을 보자 바로 불안해졌다.
“데인 에이토스, 너와 너희 대대는 아우라 바인헤븐의 대대와 자리를 바꾼다.” 나이라가 명령했다.
잠깐, 뭐라고? 아우라 바인헤븐이 누구야?
데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를 돌아보았다. “따라와.” 그는 딱 한 번 말하더니 성큼성큼 대열을 뚫고 걸었고, 우리는 종종걸음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동해오는 다른 대대를 지나쳤는데….
폐에서 숨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우리는 제4비행단으로 가고 있었다. 제이든의 비행단이었다. 1분, 어쩌면 2분 걸려서 우리는 새로 대열에 맞춰 섰다. 나는 억지로 숨을 쉬었다. 제이든의 오만하고 잘생긴 얼굴에는 욕 나오게 능글맞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이제 제이든의 지휘계통에 속한 하급자로, 완전히 그의 자비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는 아무리 사소한 위반을 두고도 나를 처벌할 수 있다. 심지어 상상 속의 위반이라 해도.
나이라의 시선에 제이든이 고개를 돌려 끄덕이면서 우리의 눈싸움이 끝났다. 심장이 달아난 말처럼 뛰고 있는 것을 보면 제이든이 이긴 게 확실하다.
“너희는 이제 모두 생도다.” 제이든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하게 안마당에 울려 퍼졌다.
“너희 비행대대를 봐라. 코덱스에서 너희를 죽이지 않는다고 보장한 사람들은 너희 대대원들뿐이다. 하지만 대대원들이 너희 목숨을 끊을 수 없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그러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드래곤을 원하나? 그럼 직접 얻어내라.”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환호했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 67명이 추락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죽었다. 딜런 같은 사람이 67명, 그 부모들은 자식의 시체를 가져가거나 소박한 묘비 아래 산자락에 묻히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사람들의 상실을 두고 차마 환호할 수가 없었다.
제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시선을 옮길 때까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지금 너희는 꽤나 끝내주는 무법자가 된 기분일 것이다. 그렇지 않나, 1학년들?”
다시 환호가 일었다.
“난간다리를 건너고 나니 무적이 된 기분이겠지, 안 그래?” 제이든이 외쳤다. “너희가 천하무적이라고 생각하겠지! 너희는 엘리트가 되는 길에 접어들었으니까! 소수의! 선택받은!”
선언이 떨어질 때마다 환호가 점점 더 커졌다.
아니야. 그냥 환호만이 아니다. 날개가 공기를 때려 굴복시키는 소리였다.
“세상에, 아름다워.” 그들이 보이자 리애넌이 옆에서 속삭였다. 드래곤 무리였다.
나는 평생을 드래곤 근처에서 살았지만 언제나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직접 선택하지 않은 인간들을 참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덟 마리의 드래곤은? 그들은 우리에게 똑바로 날아왔다. 그것도 고속으로.
그대로 우리 머리 위를 날아가겠구나 싶은 순간에 드래곤들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더니 반투명한 거대한 날개로 공기를 때리며 멈춰섰다. 날개가 만들어낸 돌풍이 어찌나 거센지, 그들이 반원형의 외벽 위에 내려앉는 동안 나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드래곤들이 움직이자 가슴 비늘이 물결쳤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벽 양쪽을 파고들었다. 그제야 외벽 두께가 왜 3미터나 되는지 이해했다. 그것은 장벽이 아니었다. 요새 가장자리는 드래곤용 횃대였다.
반사적으로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기서 5년을 살았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징집일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금껏 보지 못하고 살았다.
생도 몇 명이 비명을 질렀다. 모두가 드래곤 라이더가 되고 싶어 한다고는 해도, 6미터 앞에 실제로 서게 되면 다른가 보다.
내 바로 앞에 앉은 군청색 드래곤이 넓은 콧구멍으로 숨을 내뿜자 수증기가 얼굴을 후려쳤다. 드래곤 머리 위에서는 우아하면서도 치명적인 곡선을 그리는 파란 뿔이 반짝였다.
두 날개는 잠시 확 펴졌다가 접혔는데 날개 맨 위의 관절 끝에 딱 하나의 사나운 발톱이 얹혀 있었다. 꼬리도 똑같이 치명적일 테지만 이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꼬리라는 단서 없이는 각각이 어떤 드래곤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모든 드래곤은 존재 자체로 치명적이었다.
“또 석공들을 불러야겠군.” 드래곤들이 붙잡은 벽에서 바위가 바스러지며 내 몸통만 한 돌덩어리들이 안마당에 떨어지자 데인이 중얼거렸다.
다양한 색조의 빨간 드래곤이 셋, 미라의 드래곤인 테인과 같은 녹색이 둘, 어머니의 드래곤 같은 갈색이 하나, 오렌지색이 하나, 그리고 내 앞에 앉은 거대한 군청색이 하나. 하나같이 육중한 몸으로 성채에 그늘을 드리운 채 금빛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보며 절대적인 판단을 내렸다.
계약을 통해서 고유 능력을 개발하고 나바르 주위에 보호 마법을 치기 위해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이 필요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은 분명 우리를 다 먹어치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자비한 그리폰으로부터 드래곤들의 집이자 바스지아스 뒤쪽에 위치한 계곡인 베일을 지키고 싶어 했고, 우리는 살고 싶었으므로 지금 이렇게나 믿기 힘든 동반자 관계에 있었다
.
드래곤을 직접 마주하니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사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달아나고 싶었다. 이런 대단한 존재의 등에 올라타야 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었다.
갑자기 제3비행단에서 생도 한 명이 튀어나오더니 비명을 지르면서 우리 뒤쪽에 있는 성채로 뛰어갔다. 모두가 몸을 돌려 그 생도가 중앙에 있는 거대한 아치문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거리에서도 아치에 새겨진 문구가 보일 듯했지만, 애써 읽지 않아도 나는 이미 외워서 알고 있었다.
‘라이더 없는 드래곤은 비극이다. 드래곤 없는 라이더는 시체다.’
일단 계약을 맺은 라이더는 드래곤 없이 살지 못하지만, 대부분의 드래곤은 라이더가 죽은 후에도 잘만 살았다. 그들이 신중하게 고르는 것도 그래서였다. 겁쟁이를 골랐다가 망신당하지 않으려고 말이다. 드래곤이 실수했다고 인정하는 일이야 있을 리가 없지.
왼쪽에 있던 빨간 드래곤이 거대한 입을 벌려 내 몸집만 한 이빨을 드러냈다. 원한다면 나를 포도처럼 짓이길 수 있는 턱이었다. 그 혓바닥을 따라 불길은 섬뜩한 칼날이 되어 달아나는 생도 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생도는 성채 그림자까지 가기도 전에 자갈 위의 잿더미로 변했다.
68명 사망.
나는 열기에 옆얼굴이 화끈거리는 가운데 시선을 앞으로 홱 틀었다. 또 누군가가 달아나다가 처형당한다면… 보고 싶지 않다. 그때 또 비명이 울렸다.
나는 조용히 내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턱을 악물었다. 열풍이 두 번 더 느껴졌다. 한 번은 왼쪽, 또 한 번은 오른쪽이었다. 70명이 됐군.
군청색 드래곤이 나를 보고 고개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 가늘게 뜬 금빛 눈은 마치 내 뱃속에 똬리를 튼 두려움과 심장을 서서히 휘감는 의심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내 무릎을 감은 붕대도 볼 수 있겠지. 그 드래곤은 내가 불리하다는 것, 즉 드래곤의 앞다리를 타고 올라가기에는 너무 작고 등에 올라타 날기에는 너무 연약하다는 걸 알고 있다. 드래곤들은 항상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달아나지 않을 것이다. 도저히 극복하지 못하겠다 싶을 때마다 그만뒀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난 오늘 죽지 않을 거야. 난간다리 앞에서나, 난간다리 위에서 그랬듯이 그 말이 머릿속에 되풀이되어 울렸다.
나는 더 억지로 어깨를 펴고 턱을 들어올렸다. 군청색 드래곤은 인정한다는 뜻인지 지루하다는 뜻인지 모르게 눈을 깜박이더니 시선을 돌렸다.
“또 마음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 있나?” 제이든이 등 뒤에 선 군청색 드래곤과 똑같이 예리한 시선으로 생도들의 대열을 훑어보며 외쳤다. “없나? 잘됐군. 내년 여름 이맘때쯤이면 너희 중 절반 가까이가 죽을 것이다.” 왼쪽에서 몇 명이 터트린 때 아닌 울음소리를 제외하면 모두가 조용했다.
“그다음 해에는 다시 3분의 1이 죽고, 마지막 해에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선 너희 부모가 누구인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타우리 왕의 둘째 아들도 탈곡 도중에 죽었다. 그러니 다시 말해봐라. 지금도 라이더 분과에 들어온 스스로가 무적처럼 느껴지나? 천하무적 같아? 엘리트 같고?”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또 한 번 열기가 밀어닥쳤다. 이번에는 정통으로 내 얼굴을 때려 몸의 모든 근육이 경직됐다. 그러나 불길이 아니었다…. 그저 수증기였다. 드래곤들이 동시에 숨을 내쉬자 리애넌의 땋은 머리가 거꾸로 날렸다. 내 앞에 선 1학년의 바지 색이 어두워지더니 다리까지 번졌다. 그들은 우리에게 겁을 주고 싶어 했다. 완벽한 임무 완수였다.
“너희는 무적도 아니고 저들에게 특별하지도 않다.” 제이든이 군청색 드래곤을 가리키더니,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면서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듯이 우리에게 눈을 맞췄다. “저들에게, 너희는, 그저 먹잇감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