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놀라움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 내가 들어본 인장이라고는 드래곤이 계약한 라이더의 피부에 마법으로 남기는 표식밖에 없었다. 인장은 명예와 힘을 상징했고, 대개 그 표식을 선물한 드래곤의 형상을 띠었다. 그런데 저 표식은 소용돌이와 사선 모양으로만 이뤄졌고, 권리 주장보다는 마치 경고처럼 느껴졌다.
“드래곤이 남긴 거야?”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한테 듣기로는 멜그렌 장군이 쟤들 부모를 처형하고 나서 장군의 드래곤이 애들 모두에게 저걸 남겼다던데, 그 문제에 대해 더 말하기는 꺼리더라고. 부모가 반역을 저지르지 못하게 막으려면 아이들을 벌하는 것만 한 방법이 없긴 해.”
무척 잔인해 보였지만 바스지아스의 첫 번째 원칙은 드래곤에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드래곤들은 무례하다 싶으면 누구든 불태워 없앴다.
“물론 반역의 인장이 찍힌 아이들은 대부분 티렌더 출신이지만 다른 지방에서 배신자로 돌아선 부모들의 자식도 몇 명 있….” 미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더니, 내 배낭끈을 잡고 돌려세워서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방금 기억났어.” 언니가 목소리를 낮췄고, 그 다급한 말투에 심장이 펄쩍 뛴 나는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제이든 라이오슨은 꼭 피해 다녀.”
순간, 폐에서 공기가 빠져나갔다. 그 이름은….
“그 제이든 라이오슨 맞아.” 언니는 두려움이 피어난 눈빛으로 내 짐작을 확인해줬다. “3학년이고 네가 누군지 알자마자 죽이려 달려들 거야.”
“그 아버지가 대반역자였잖아. 반역을 이끈.”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제이든이 여기서 뭐하는 거야?”
“당시 반역 지도자들의 자식은 부모 죄에 대한 처벌로 징집됐어.” 미라가 말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옆으로 발을 끌면서 줄과 함께 움직였다. “엄마가 말해줬는데, 라이오슨이 난간다리를 통과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대. 그 후에는 어느 생도가 죽이겠거니 했고, 그런데 드래곤이 그놈을 선택하고 나서는….”
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후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지. 지금은 비행단장으로 진급했어.”
“개소리.” 나는 분노가 들끓었다.
“그놈은 나바르에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렇다고 너를 가만히 놔두진 않을 거야. 일단 난간다리를 건너가면, 물론 넌 건너갈 테니까 하는 말이지만 데인을 찾아. 데인이 널 자기 대대에 넣어줄 거야. 데인의 대대가 라이오슨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만 바라자.” 미라는 내 배낭끈을 더 강하게 쥐며 말했다.
“그놈에게 접근하지, 마.”
“확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라이더 분과 명단이 놓인 나무 테이블 뒤에서 목소리가 날아왔다. 인장이 보이는 라이더 한 명이 내가 아는 서기 옆에 앉아 있었다. 피츠기븐스 대위가 비바람에 삭은 얼굴 위로 은빛 눈썹을 올렸다. “바이올렛 소른게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깃펜을 들어 명단에 있는 빈칸에 이름을 적었다.
“넌 서기 분과에 가는 줄 알았는데.” 피츠기븐스 대위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대위의 크림색 튜닉이 부러워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소른게일 장군께서 다른 선택을 하셨죠.” 미라가 대신 말했다.
나이 많은 대위의 눈에 슬픔이 차올랐다. “안타깝군. 넌 정말 앞날이 창창했는데.”
“맙소사.” 피츠기븐스 대위 옆에 있던 라이더가 끼어들 듯이 말했다. “미라 소른게일?” 입을 떡 벌린 모습을 보니 그 남자가 숭배하는 영웅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맞아요.”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내 동생인 바이올렛. 1학년이 될 거예요.
“난간다리에서 살아남는다면 그렇지.” 뒤에 있던 누군가가 빈정거렸다.
“바람이 바로 날려버릴 수도 있잖아.”
“스트리스모어에서 싸우셨죠.” 책상 앞에 앉은 라이더의 목소리에서 미라를 향한 경외심이 뚝뚝 떨어졌다. “거기서 적진 안쪽의 포대를 쓸어버린 공으로 발톱 훈장을 받으셨고요.”
뒤쪽에서 낄낄대던 소리가 멎었다.
“말한 대로….” 미라는 내 등에 손을 얹었다. “이쪽은 내 동생, 바이올렛이에요.”
“길은 알겠지?” 대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망루로 들어가는 열린 문을 가리켰다. 망루 안쪽의 불길한 어둠을 보니 죽어라 달아나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길이야 알죠.” 미라는 그렇게 확언하고는, 내 뒤에서 비웃던 놈이 명단에 서명할 수 있게 나를 끌고 테이블을 지나쳤다.
우리는 문 앞에 멈춰서 서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죽지 마, 바이올렛. 난 하나뿐인 자식이 되기 싫어.” 언니는 씩 웃고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지원자들의 줄을 지나쳐 갔다. 미라의 정체가 드러나자 지원자들이 얼빠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런, 기대에 부응하려면 힘들겠는데.” 내 바로 앞에 있던 여자 지원자가 말을 건넸다.
“맞아.” 나는 배낭끈을 잡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서 맞장구를 쳤다. 내 눈은 휘어진 계단을 따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 있는 창문 틈으로 새어드는 흐릿한 빛에 빠르게 적응했다.
“소른게일이라면 그…?” 죽을 수도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그 여자가 어깨 너머로 나를 돌아보고 물었다.
“응.” 난간이 없었기에 나는 돌벽에 손을 댄 채로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그 장군님?” 그녀 앞에 가던 금발 청년이 물었다.
“바로 그분이시지.” 나는 설핏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누구든 자기 엄마와 그렇게 꽉 끌어안는 사람이라면 그리 나쁜 사람일 리 없겠지?
“우와, 그리고 멋진 가죽옷인데.” 청년이 마주 웃었다.
“고마워. 우리 언니가 챙겨준 거야.”
“난간다리까지 가기도 전에 계단을 헛디뎌서 떨어져 죽은 지원자가 얼마나 될까 모르겠다.” 여자는 계속 올라가면서 나선계단 중앙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작년에 두 명 있었지.” 내 말에 여자가 뒤를 휙 돌아봤다. “흠, 떨어진 남자가 깔아뭉갠 여자까지 합하면 셋.”
여자의 갈색 눈이 순간 커졌지만 다시 앞을 보며 계단을 올랐다. “계단 수는 몇 개나 되는데?”
“250개.” 나는 대답했고, 우리는 이후 5분 동안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 여자는 꼭대기가 가까워지고 지원자들의 줄이 멈춰서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난 리애넌 마티아스라고 해.”
“난 딜런이야.” 금발 청년이 열렬히 손을 흔들며 응답했다.
“바이올렛이야.” 나는 우정 따위는 기대하지 말고 동맹만 맺으라던 미라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며 두 사람에게 긴장된 미소를 지었다.
“내 평생 오늘만 기다린 것 같아.” 딜런은 짊어진 배낭 위치를 바로잡았다.
“우리가 정말로 여기까지 오다니 믿겨져? 꿈이 실현된 순간이야.”
그렇겠지. 당연하게도 나를 뺀 다른 라이더 지원자들은 모두가 여기 온 데 신이 나 있었다. 바스지아스 군사학교에서 징집병을 받지 않는 분과는 오직 이곳뿐이었다. 여기엔 자원한 사람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기다릴 수가 없네.” 리애넌의 미소가 커졌다. “세상에 드래곤을 타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
나. 이론상으로야 재미있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다만 졸업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뱃속이 뒤틀릴 정도로 끔찍할 뿐이었다.
“너희 부모님은 찬성하셨어?” 딜런이 물었다. “우리 엄마는 몇 달이나 나보고 마음을 바꾸라고 간청했거든. 라이더여야 진급할 기회가 더 있다고 계속 말하는데도 엄마는 내가 힐러 분과에 들어가길 원했어.”
“우리 부모님은 언제나 내가 여길 원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꽤 지지해줬어. 게다가 애지중지할 자식이라면 내 쌍둥이 자매도 있고. 레이건은 벌써 꿈꾸던 대로 결혼해서 아기도 낳을 예정이지.” 리애넌은 나를 흘긋 돌아보았다.
“넌 어때? 맞혀볼까. 소른게일 같은 가문 이름이 있으니 올해 첫 번째로 자원했겠지.”
“그보다는 지원 명령을 받은 셈이지.” 내 대답은 리애넌보다 훨씬 열의가 없었다.
“알아먹었어.”
“그리고 라이더가 다른 장교보다 특전이 있는 건 사실이야.” 나는 줄이 다시 앞으로 움직이자 걸어가며 딜런에게 말했다. 내 뒤에서 비웃던 지원자도 시뻘건 얼굴로 땀을 흘리며 따라잡았다. 이젠 누가 비웃는지 보라지. “봉급도 더 높고, 제복 정책도 더 관대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검은색이기만 하면 라이더가 뭘 입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라이더에게 적용되는 유일한 규칙은 내가 코덱스에서 외운 것뿐이었다.
“그리고 최고로 폼 나는 존재라고 자부할 권리가 생기지.” 리애넌이 덧붙였다.
“그것도 있지.” 나는 동의했다. “비행용 가죽옷으로 자부심을 한껏 세울 수 있을 거야.”
“더해서, 라이더들은 다른 분과보다 결혼을 일찍 해도 된다고 들었어.” 딜런이 덧붙였다.
“사실이야. 졸업하고 바로 해도 돼.” 살아남는다면 말이지만. “아마 혈통을 잇고 싶어서겠지.” 가장 성공한 라이더들은 과거의 유산이니까.
“아니면 다른 분과보다 빨리 죽는 경향이 있어서일지도.” 리애넌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난 안 죽어.” 딜런은 튜닉 속에서 사슬에 달린 반지를 꺼내 보이며 나보다 훨씬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떠나기 전에 청혼하면 불운이 닥친다고 해서 우린 졸업까지 기다리기로 했어.” 딜런은 반지에 입을 맞추더니 목걸이를 옷깃 아래로 다시 집어넣었다. “앞으로 3년이 길긴 하겠지만 그럴 가치가 있어.”
나는 한숨을 삼켰다. 평생 이렇게 낭만적인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나.
“네가 난간다리를 건너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우리 뒤에 있던 남자가 비웃었다. “여기 이 녀석은 산들바람 한 번 불면 계곡 바닥에 떨어질 텐데.”
나는 눈을 굴렸다.
“닥치고 네 일에나 신경 써.” 리애넌이 쏘아붙이는데, 돌계단을 밟는 발에서 철컹 소리가 났다. 계단 꼭대기가 보이고, 문에 흐릿한 빛이 가득 담겼다. 미라 말대로였다. 저 구름이라면 우리에게 재앙을 쏟아부을 텐데 그러기 전에 난간다리 건너편에 가 있어야 했다. 한 계단을 또 오르자 리애넌의 발에서 쇳소리가 났다.
“네 부츠 좀 보여줘.” 나는 재수 없는 뒷사람이 듣지 못하게 조용히 말했다. 리애넌은 이마에 주름을 잡고 갈색 눈에 당혹감을 보였지만, 그래도 신발을 보여줬다. 내가 아까 신고 있던 것처럼 밑창이 매끄러웠다. 그걸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줄이 다시 움직이더니, 입구에서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춰섰다.
“발 크기가 몇이야?” 내가 물었다.
“뭐?” 리애넌은 나를 보고 눈을 껌벅였다.
“네 발 크기. 몇이냐고.”
“250.” 리애넌은 미간에 주름을 두 개나 잡고 대답했다.
“난 240이야.” 나는 재빨리 말했다. “그러니 죽도록 아프겠지만 내 왼쪽 신발을 네가 신었으면 좋겠어. 바꾸자.” 내 오른쪽 신발에는 단검이 있었다.
“뭐?” 리애넌은 제정신이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내가 미쳤는 지도 모르겠다.